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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세기 아시아가 세계 경제의 중심이었다.(중국이 그랬었다. 영원한 것은 없고, 부패한 자들은 오래 못간다)자기개발 2024. 2. 17. 10:53
역사적으로 문전 전개의 주역이 아시아였다. 14세기 이전부터 지금까지 쭈욱 그래왔다.
유럽의 동방 진출과 아시아읠 쪼그라듦, 그 이후 다시 일어서는 아시아에 대해 생각나는 대로
그려 보았다.
1.역사적 문명 전개의 주역 아시아
아시아는 중국 당나라 시기에 서역과 활발하게 교류하였다.
그 과정에서 수많은 문명의 산물을 서역에 전파하였다.
또한, 서역의 많은 문물을 아시아로 들여오기도 하였습니다.
그 도구중 하나인 육해상의 실크로드가 큰 역할을 했습니다.
서구는 아시아의 향신료, 차, 도자기 등에 매료되었으며, 인기가 매우 좋았다.
그러나 서구의 근대화와 그에따른 성장(항해술 발달, 산업혁명)은
아시아 국가들에 대한 강압적 개방과
아편전쟁 등 수많은 충돌을 야기했으며
아시아는 문명의 저편으로 추락시켰다.
최근 아시아 주요 신층국들의 산업성장하였다.
가.실크로드
비단길(silk road=route) 고대에 비단무역을 계기로 하여 중국과 서역 각국의 정치 경제 문화를 이어준 육해 교통로를 총칭합니다. 독일의 지리학자 리히트호펜은 실크로드라는 단어를 처음 사용하였습니다.
총 길이가 6400km에 달하는 실크로드는 중국 중원지방에서 시작하여 허시후이랑, 타클라마칸 사막, 파미르 고원, 중앙아시아 초원, 이란고원을 지나 지중해 동안과 북안에 이릅니다.
실크로드 또한, 지형적 특성에 따라 동쪽 부분은 장안, 뤄양을 기점으로 했고 허시후이랑이 중요 길목이었습니다.
그리고 중앙 지역은 둔황부터 타클라마칸 사막을 기점으로 길이 나뉩니다.
엄청 길어서 러시아, 아프가니스탄, 파키스탄, 인도 등 10여개의 국가를 거쳐 갔습니다.
실크로드 처음 열린 시기 실크로드가 처음 열린 전한시대(bc 206년경~AD25) 한무제는
대월지, 오손과 연합하여 흉노족을 물리치고 서아시아로 통하는 교통로를 확보-2차례에 걸쳐
장건을 중앙 아시아로 파견하여 서역이라고 칭해지던 중앙 아시아 및 서방 각지와 사절을 교환, 문물을 왕래함
실크로드를 통한 교역이 가장 활발하던 시기는 당나라 시기였습니다. (기원후 618~907)
당시 북방지역에 돌궐이 강력한 세력을 형성하고 중원을 위협했을 뿐만 아니라, 실크로드를 통한 교역에도 큰 장애가 되던 시기였습니다. 마침 돌궐이 동서로 분열되고, 당태종은 서돌궐을 제압하였다.
여기서 태종은 한대의 서역국가인 구자와 북정에 안서도호부와 북정도호부를 설치하여 텐산 남불로를 관장하였습니다.
이후로 비단부역을 비롯한 동서무역이 호라발하게 전개 되었고, 소그디아나라곳의 소그드 상인이 중개무역상으로 활약하였습니다.
9세기 무렵 당의 세력이 쇠퇴하여 북아시아에서 이주한 위그르족과 서쪽에서 진출한 이슬람상인이 그들을 대체하였고,
송대 이후 광저우를 지나 스리랑카 파르티아 홍해를 지나 카이로 시리아로 가는 해상 실크로드가 발전하였습니다.
이와 함께 육로는 쇠퇴해 갔습니다.
나.당나라의 서역 확장
당태종(628~649년) 중국 당나라 태종은 중국과 중동, 지중해 연안을 연결하는 실크로드를 지배하기 위해
중앙아시아까지 세력을 확장했습니다. 8세기의 중국은 힌두쿠시 산맥까지 뻗은 1,610km가량의 지역을 정복한 상태였지만, 이슬람화된 아랍인도 나름의 확장 계획을 품고 있었는데,
탈라스 전투는 751년 7월~8월 이어진 전투로, 고구려 출신 당나라 장수 고선지 장군이 이끄는 당나라 군과 카를루크 연합군이 아바스왕조, 티베트연합군을 상대로 지금의 카자흐스탄 탈라스 강 유역에서 중앙아시아의 패권을 두고 싸운 전투였습니다. 아바스 왕조는 이 전투의 승리로 중앙아시아에서 이슬람 세력의 기반을 굳히게 되었고, 유목민족들 사이에 이슬람교가 퍼지기 시장했습니다. 당나라군 병사의 상당수가 포로로 붙잡히게 되었고, 종이를 만드는 기술을 갖고 있는 기술자가 포함되어 제지술이 이슬람 세계에 퍼지게 되는 직접적인 계기가 되기도 했습니다.
이후 당나라는 안녹산의 난이 일어나면서 국력이 쇠퇴해 더이상의 서역경영이 어려워졌습니다.
다.노마드의 문명 / 몽골의 정복 루트 - 문명의 이동 루트
몽골에 제국을 세우고 그 영토가 14세기 초 절정에 달하였을 때 그 면적은 2,350만 평방km 였습니다. 현대국가중 가장 영토가 넓었던 소련(소비에트연방 2,240만 평방km)보다 컸습니다.
대영제국에 이어 2위 입니다. (영국이 엄청난 국가이긴 합니다.)
몽골제국은 초원의 제국, 영역형 제국으로 중원의 제국들이나 고구려, 중동의 나라들과는 다릅니다.
제국이란 어떤 세력이 광대한 지역에 영역을 설정한 후 광대역을 통제하고 통치하기 위해 만들어낸 정치적인 시스템입니다. 영역형 제국으로 관리를 파견하고 세금을 걷어 행정력을 확보합니다.
몽골제국과 같은 유목제국의 경우 지도자의 군사력으로 확보한 재물을 구성원들에게 골고루 나누어 줌으로서 유지되어왔습니다. 물품분배의 대사로 충성을 이끌어냈습니다.
1)유목사회와 정착사회의 차이점
전 부족이 통일됐던 몽골은 강력한 군사력을 가졌지만, 인구가 밀집된 정착형 국가에 비하면 군사의 수가 수적으로 초라했습니만, 기마집단 특유의 기동성과 함께 말을 탈 수 있는 성인 남성을 모두 군사력으로 동원할 수 있다는 점이 강점이었습니다. 아울러 활을 쏘고 사냥감을 잡아들이는 능력이 있어서, 일상 자체가 군사훈련이었기 때문에 장기간 훈련 없이 빠르게 전장에 투입되어 정착국가와 싸울 때 큰 장점으로 작용하였습니다.
또한 전쟁 참여로 얻는 노획물이 일을 하지 못하는 비용보다 몇 배는 컸습니다. 즉, 유목민족에게 있어 전쟁 자체가 생산활동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초원의 길은 몽골인의 고속도로였습니다. 말을 탄 몽골인들은 초원을 따라 자유롭게 이동하였습니다. 세간도 많지 않았고, 집도 천막의 형식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해체하여 수레에 싣고 이동이 가능했습니다.
대부분의 경우 유목민들의 이동은 계절에 따라 가축이 살기 좋은 곳으로 옮겨 다니는 정도에 지나지 않았습니다만,
다른 부족에게 패하는 경우나 인근 정착국가로부터의 압박이 있는 경우 자신들이 살고 있던 곳을 떠나 아예 다른 곳으로 이동하는 경우가 많았다고 합니다.
2)몽골제국
몽골제국은 당시 알려진 세계의 절반 이상을 지배하였습니다. 초원의 길에서 태어난 칭기즈칸은 바이카호 인근 대초원과 중앙아시아, 북중국을 몽골 울루스로 거대한 제국을 만들었지만, 거기서 멈추지 않았습니다.
러시아 후에는 유럽을 침공할 계획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악마의 기마병들은 초원의 길을 따라 서쪽으로 뻗어가고 있었습니다. 서양인들의 무의식 속에 황화로 자리잡게 되는 몽골의 서방침공이 시작된 것입니다.
이렇게 몽골제국은 세계의 절반 이상을 지배하고, 30여국 이상 복속 시켰으며, 수천의 도시가 파괴되었고, 1,850만 명을 학살 한 것으로 역사에 기록되어 집니다.
1271년 칭기즈칸의 손자 쿠빌라이칸은 수도를 북경으로 옮기고 원나라를 세웁니다.
라.실크로드 중개문명의 주인공 소그드인
소그드인은 이란계통의 민족입니다. 사마르칸트에 있었지요. 실크로드의 중심지입니다.
지리적 이점을 활용하여 실크로드의 국제 상권을 주도적으로 이끌었고, 동서양 문명과 문화가 교류하는 데 큰 역할을 하였습니다.
사마르칸트는 실코로드의 심장, 동방의 로마, 동방 세계 이슬람의 진주로 불리며 토지가 기름져서 포도, 목화 등 농업이 발달하였고, 부하라는 수공업 특히 양탄자 직조 기술로 유명했습니다. 유리, 은세공품, 장신구, 비파, 모직, 향료, 약재, 석류, 호두, 오이, 마늘, 후추 등은 물론 기린, 사자, 코끼리 등을 인도, 로마, 멀리는 한반도까지 전달하는 역할을 하였습니다.
비단과 함께 인류의 4대 발명품이라고 할 수 있는 화약, 나침반, 종이, 활판 인쇄술을 중국에서 서쪽으로 전달하기도 했습니다.
서양이 유럽중심의 세계사를 열 수 있었던 데에는 이러한 동방의 기술이 서양으로 옮겨갔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종교 또한 마찬가지였다.
정향과 유럽의 음식문화
후추, 정향, 육두구는 생상지 주민들에게는 흔했지만, 유럽인들에게는 은보다 귀한 물건이었습니다. 사람들은 향신료를 쌀과 면포 등 상인들이 날라온 생필품과 물물교환 하였는데, 인도산 면직물을 가져가기 위해 인도 서북부의 구자라트에서 온 이슬람교도들은 정향이나 육두구를 말레이반도의 물자 집산지인 몰루카로 운반만 해도 5배~10배 이상 값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이렇게 인도에서 이집트 이탈리아까지 오면서 향신료의 가격은 최고 80배 까지 비싼 값에 팔렸습니다.
15세기 말 유럽에 들어온 향신료는 매년 2만~4만톤이었고, 이슬람 상인과 이탈리아 상인들이 향신료 운반 과정에서 엄청난 부를 축적했습니다.
15세기 후반부터 향신료를 직접 찾아 나서는 사람들이 나타났습니다.
15세기에서 16게기에 걸친 대항해시대에 바스쿠 다 가마가 새로운 항로의 목적은 크리스크교와 향신료 다 라고 말했을 정도입니다. 유럽인들의 동방에 대한 관심은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과 더불어 향신료로 인한 수익 창출을 목적으로 했고, 향신료를 찾아 항해에 나섰지만, 그들은 향신료만 아니라 땅도 정복했습니다.
차나무와 아편전쟁, 유럽의 차문화
영국과 네덜란드는 1720년~1722년 사이에 아시아로부터 녹차와 홍차를 주로 수입했습니다.
엄청난 양의 차를 중국으로부터 수입하면서 무역 적자가 났고, 이를 만회하기 위해
1700년대 중반부터 아편을 중국에 수출하기 시작했고,
중국에서는 아편을 없애기 위해 노력했지만, 중독성이 강한 아편을 쉽게 없앨 수 없었습니다.
영국은 이로서 대중국 무역에서 적자를 탈피할 수 있었습니다.
아편을 밀수하는 업자들도 수익이 좋았고, 각계각층에서 인기가 좋았기에 농민들조차 아편을 재배하여 판매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아편을 수입하느라 중국 경제 폭망 이렇게 하여 대영제국이 세계를 제패했던 시대에 중국은 희생되었고, 이후에 쇠락하여 청일전쟁, 중일전쟁으로 폭망하게 됩니다. 예로부터 당나라 군대 라는 말이 있지요? 썩어빠진 사람들이 많고, 부끄러움을 모르니 횡령, 사기가 판치는 나라였고, 그렇기에 외부세력에 쉽게 파괴된 것 아닐까 싶습니다.
현대 중국 공산당은 그걸 잘 알기에, 사형제도를 두고 잔인하게 통치를 하고 있고요,
반간첩법이라는 말도 안되는 법으로 외국인을 위협하고, 중국 기업들은 부끄러움도 모르고 선진기술을 탈취하기 위해 스파이짓 하고 있고, 반정부 세력을 잡아들이기 위해 각국에 불법경찰을 풀어서 활동시키고 본국으로 송환시킨다고 하지요?
이런 나라가 오래 가겠습니까?
네... 가만히 두면 오래 가겠지요?
하지만 대영제국때 망한 중국과 마찬가지로
지금은 미국이라는 세계의 경찰한테 까부는 형국으로 .... 중국이 괜찮을까요??
아닐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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